빙탄상애

  • 장르: 로맨스, 기타
  • 분량: 20매
  • 소개: 너는 얼음이었으나 나는 미처 숯이 되지 못했다. 더보기
작가

빙탄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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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비치는 물그림자가 눈에 설었다.

 

저것이 어제도 있었던가, 아니었던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던가, 아니면 영겁의 시간 내내 희석되며 머무르던 것이었던가. 처음의 강렬했던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매가리 없이 울렁이는 수영(水影) 탓에 심중이 산란해졌다. 가슴이 허허롭다. 벌건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응시하던 나는 서서히 사라지는 그림자를 향해 작게 비소를 터뜨렸다. 결국 빛의 놀음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아아, 눈부신 노오란 색의 물결들이 사그라진다. 마지막 물결의 흐름에 따라 정신이 아득해짐에 메말라버린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허나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또한 하나의 그림자라는 것을. 설아, 너의 영은 내 혼에 깊숙이 박혀, 영영 마르지 않을 상흔을 남기고, 나의 영은 너의 혼에 박혀, 영영 머무를 곳을 잃어버렸구나.

 

설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설아, 설아, 설, 아……

 

 
 ***
 

유난히도 추웠기에 호랑이도 제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소문이 돌던 해 겨울이었다. 겨울은 유독 차가웠으며 매정했고 눈꽃들은 서러운 짠 기로 수놓아졌다. 내 발걸음 위로 다시 눈이 소복이 쌓였다. 다시는 발도 못 디딜 정도로 위협적으로 쌓였다.

 

나는 남들보다 비교적 빠른 나이에 성균관에 입관한, 아직은 덜 여문 청년임과 동시에 소년이라기엔 나이가 많고 사내라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물론 입관한 처음 며칠은 행복했었다.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보고 싶었던 고서적들과 값비싼 책들도 한 가득, 그리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수학의 끝에는 태양과의 경연이 존재했기에. 허나 즐거운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달에 30회 이상 치러지는 시험들과 숨 막히는 경쟁에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그만 병을 얻어버리고 말았다.

 

성균관 소속 의원이 내 맥을 짚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마음의 병이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어찌해야 하오. 동문수학하는 동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집이로구나, 머릿속의 내가 답했다. 집으로 갈 수밖에 없소. 의원이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내 생각을 천천히 읊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의 길목은 한산했다. 눈에 익숙한 성황당 나무 밑 돌탑에 시선을 던지며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꾹꾹 눌렀다. 안 된다. 스스로에게 달래 듯 중얼거리며 나는 말을 재촉했다. 지금 여기서 눈물을 흘려버리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리라. 무릇, 선비는 함부로 눈물을 쏟아내지 않아야 했다.

 

기억 속의 동네와 지금 목도하는 동네의 것엔 차이가 전혀 없었다. 시간이 머무르고 있었다. 추억이 고여 있었다. 집의 대문은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한양의 기타 부잣집처럼 화려하게 올린 휘황함은 없었으나 단정하고 청아한 느낌이 있었다. 문 앞에서 문지기를 부르는 목소리가 떨린다. 음파가 문지기의 귀에 닿자 물결이 되어버린 파장은 일파천리로 모든 것을 휩쓸었다. 김 집사가 뛰어오고 유모가 깨금발로 달려 나왔다. 행랑어멈이 환하게 웃었고, 행랑아범은 허겁지겁 말을 데려갔다.

 

몇 해 전에 한양까지 동행했던 막동이의 땋은 머리는 어느새 상투가 틀어져 있었다. 시간이 마냥 고여있던 것은 아니구나, 홀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요란한 법석 가운데 네가 홀로 서 있었다. 동백기름을 곱게 바른 삼단 같은 머리칼을 단단하게 땋아, 붉은 댕기를 드린 네가 있었다.

 

사랑방으로 날 안내하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난 네 눈동자를 보았다. 새카맣게 죽어있는, 아무런 흔적도 담지 않은 완전한 검은 눈동자를.

 

그 속엔 내가 있었다.

 

네가 미소 지었다.

 
*
 

설이라고 부르고 있습디다. 어머님께서 넌지시 흘리셨다. 雪.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너는 내가 없었던 삼년 여의 시간 동안 이 집의 자식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그에 네게 고마웠다. 네가 있었기에 이 집이 헛헛하지는 않았을 성 싶었다. 설아. 입 속에서 구르는 이름이 서느러니 보드라웠다. 고맙다. 듣는 이 없는 고백이 수줍게 월광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