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의 달팽이

  • 장르: 일반, 판타지
  • 평점×1명 | 분량: 50매
  • 소개: 지우개의 기묘한 모험 더보기
작가

서랍장의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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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서랍장 안에서는 평소처럼 스테이플러가 샤프심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자는 그 둘을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으며, 서랍장에 들어온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도록 바깥세상 구경을 못 해본 지우개는 제발 오늘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며 투덜대고 있었고 이따금 오래된 스피커가 일어나서 다들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던 그런 날이었지요.

하지만 모든 날이 무언가 조금씩은 다르듯이, 그날도 다른 날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시계가 쉰 목소리로 3시를 외치고 얼마 안 지나서, 갑자기 그가 방에 들어오더니 서랍장을 열고 지우개를 꺼내서 들고 가버린 것입니다.

서랍장 안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스테이플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샤프심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한참이 흘러서야 늘 침묵을 지키던 자가 한마디 했습니다.

“갔네.”

그제야 어느 새부턴가 깨어있던 스피커는 다시 잠들 수 있었고, 스테이플러는 이제 지우개가 투덜대는 걸 듣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지우개가 없었던 마냥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지우개는 들떴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태어나자마자 어느 문구점에 들어가서 구석진 자리에서 장장 3년을 기다리다가 그 집으로 가게 된 것인데, 그러자마자 다시 서랍장 안에서 또 2년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세상 구경을 해보게 된 것이었으니까요. 문구점에서 옆의 친구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먼저 가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응원해주던 기억, 그러다가 결국 3년째 진열장 구석의 찬밥 신세가 되자 포기하고 말았던 아픔, 기적적으로 발견되면서 가졌던 설렘, 그리고 서랍장 안에서의 끝없는 기다림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아아,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요.

잔뜩 흥분한 채로, 지우개는 필통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다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지우개를 좀 안됐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연필이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새로 들어온 지우개구나. 밖으로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처음에는 정말 힘들 텐데, 조금만 지나면 견딜 만해질 거야. 잘 지내보자.”

“처음에는 힘들 거라고? 도대체 무슨 얘기야? 그리고 전에도 지우개가 있었어? 그럼 걔는….”

“워워, 한 번에 하나씩. 무슨 일을 할 건지는 곧 알게 될 테니까 천천히 기다리면 돼. 전에 있었던 지우개는 그저께 책상 밖으로 떨어졌어. 사실 책상 밖으로 떨어지는 일이 대단한 건 아닌데, 흔한 일인 데다 보통은 다시 주워지거든. 그런데 그제는 눈치를 못 챘는지 줍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지 뭐야. 좋은 친구였는데 참 아쉬워.”

“그러면 그 지우개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아마 다른 누군가가 주워주길 기다리며 지내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모르고…. 별일 없길 바라야지.”

“…….”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마. 반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까,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어.”

 

결국, 지우개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비몽사몽 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 물론 필통 안에서는 밖이 안 보였지만, 가방 안에서 필통이 이리저리 흔들렸으니까요. 수업이 시작되자 연필이 나갔고, 곧 지우개도 덥석 집혀서는 책상 위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우개는 새로 만난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해주었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몸통이 잡혀 종이에 박박 문질러지면서 지우개는 자신의 몸이 갈려져 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지요.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마치 한 시간은 되는 것 같았던 그 일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끝났습니다. 책상 위에서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로 멍하니 있던 지우개는 연필도 머리가 종이에 갈리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필통으로 돌아와서 지우개는 펑펑 울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제 몸을 갈아내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고 만 것이죠. 연필이 지우개를 토닥여 줬습니다.

“괜찮아,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오늘만 펑펑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 진정되고 나서 지우개는 연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너는 그걸 어떻게 참고 견디는 거야? 아프지 않아?”

“나도 처음에는 아팠는데, 조금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 아마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시간이 흐르면서 지우개의 몸은 점점 둥글어져 갔고, 연필이 말한 대로 더는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끔 실수로 땅에 떨어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금방 주워졌고 지우개는 그런 일에도 익숙해졌지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2.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필통 안은 늘 그렇듯이 고요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지우개도 말을 잃었고, 연필도 누가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요. 자는 구석에서 졸고 있었고, 지우개는 책상 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날이 서로 다르듯이 그날도 무언가가 조금 달랐습니다. 지우개를 쓰고 나서 지우개 가루를 손으로 털어내던 그가 실수로 지우개를 툭 쳐서 창문 밖으로 날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우개는 당황했습니다. 평소보다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길기도 했거니와, 주위 풍경이 뭐랄까, 좀 더 살아있었지요.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났고 지우개는 땅에 툭 하고 닿았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꺅!” 하는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지우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새 한 마리가 총총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머, 갑자기 옆에 뭐가 뚝 떨어져서 깜짝 놀랐네. 넌 누구니? 어디에서 온 거야? 설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니? 몸은 괜찮아?”

“어, 난 괜찮아…. 그리고 난 지우개라고 해.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내가 어딘가에서 떨어진 건 맞는데, 그게 어딘지는 도통 모르겠네.”

“여기는 학교 뒷마당이고, 하늘에는 구름밖에 없으니 네가 떨어진 곳은 저 창문 중 하나겠네. 뭘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조심 좀 하지. 아,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지 말을 안 했구나. 난 까치고, 저기 저 나무 위에 살아. 자, 몸이 괜찮으면 이제 일어나야지.”

지우개는 까치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일어난다니?”

“응? 그러면 어떻게…. 아, 넌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그러면 내가 널 물어다 주면 되니까,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보내줄까? 저기 있는 교실 중 하나에서 온 것 같은데.”

“아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래? 그러면 내 둥지로 가자. 거기서 네 이야기를 들려줘.”

“무슨 이야기?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없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이 있을 것 아냐. 엄마는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든지 배울 것이 있다고 하셨고, 나도 지금까지 많은 친구를 만나면서 그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색하면 나부터 얘기할까? 아니다, 굳이 불편하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는 없지. 어서 내 둥지로 가자.”

까치는 지우개를 부리에 물고 나무 위로 날아갔습니다.

둥지 위에서 까치는 지우개를 내려놓고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이게 웬걸, 지우개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왜 그래? 혹시 멀미해?”

“…….”

“이봐, 괜찮아?”

“…….”

“야!”

“아, 미안… 방금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본 기분이야.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된 것 같아….”

“고작 그 정도를 봐놓고선 세상이 넓네 뭐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학교 밖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아예 기절하는 거 아니야?”

“…….”

“그래, 아무래도 네 이야기를 먼저 들어봐야겠어.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땅에서 나무까지 올라오는 동안 본 걸 가지고 세상이 넓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말이야. 어차피 그 상태로는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은걸.”

 

그렇게 지우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쭉 했습니다.

“음,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이름이 지우개였구나. 그것참 슬픈 이야기구나….”

“내 이름은 또 왜?”

“지우개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 것 같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특별한 뜻이 있는 거였어?”

“인간들이 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건 알고 있어. 내가 태어났을 때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

“그래, 그러면 인간들이 너를 왜 만들었을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나를 잡아서는 종이에 대고 박박 문질렀지. 뭐 그런 걸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 바로 그거야. 네 이름이 의미하는 게 무언가를 지우는 물건이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너는 오로지 그 일 하나를 위해 태어난 거고, 그렇게, 그렇게 몸을 갈고 또 갈아내서 결국은 사라져버릴 그럴 운명이었단 말이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 필통 안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할 바깥세상만 끊임없이 상상하다가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지…. 그렇게 창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런 것도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친구가 그냥 그렇게 가버렸을 거라는 사실이 참…. 그래, 이제 다시는 그런 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내가 바깥세상이 정말로 어떤 곳인지 구경도 시켜 줄 수 있을 테니까 이젠 훨씬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난 그날 밤, 지우개는 난생처음 보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까치는 진작 피곤하다며 잠들었지만, 지우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색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서는 더 짙은 남색에 서서히 덮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또 하늘에 반짝이는 점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침내 셀 수없이 많은 점이 내가 여기 있다고 그렇게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지우개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지우개가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까치는 언제 일어났는지 입에 지렁이 한 마리를 물고서는 지우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너 알고 보니까 굉장한 잠꾸러기였네.”

“어젯밤에 하늘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정말 예뻐서 너무 늦게 잔 것 같아…. 그런데 낮에는 안 보이던 반짝이는 점이 많이 보였는데, 그건 뭐야?”

“아, 그건 별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