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화 – 누구나 마음속에는 마지못해 불살라버린 꿈이 하나쯤 있다.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1부 만남, 그리고 시작
 

 

1

 

“승객 여러분, 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오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독 소장과 승주는 긴장이 밀려와 마치 사막 땡볕에 노출된 듯 온 신경이 화끈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은 점점 더 볶아쳐댔다. 비행하기에 좋지 않은 굳은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등받이에 기댄 채 각각 커피 잔과 영화 모니터에 눈길을 줬지만 그저 눈길을 걸쳤을 뿐, 마음 속 눈길은 20만 리 바다 건너 어딘가에 꽂혀 있었다.

 

“휴, 이제 드디어 시작이군.”

 

독 소장의 얼굴 근육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지다 못해 된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얼어 보였다. 승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 시작도 안 했죠. 도착하려면 열두 시간이나 남았다고요. 벌써부터 그렇게 긴장하시면 어떡해요. 지금 소장님 얼굴 표정 장난 아니에요. 그러다 꽁꽁 얼어붙겠네요.”

 

“흥, 남 말 하기는. 얼굴 모공까지 떨리고 있는 거 다 보인다네, 이 청년아.”

 

승주는 회의에 찬 어조로 웅얼거렸다.

 

“솔직히 이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요? 첫 사건치고 너무 큰 걸……”

 

“허허, 또 초 치는 소리! 그렇게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비행기문 박차고 돌아가든가.”

 

독 소장의 쓴소리에 승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소심해지면 곤란하다. 비장한 마음가짐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가짜 자신감일지언정 이 불안한 모험에 의지가 될 테니까. 승주는 비장함과 관련된 기억들을 죄다 그러모았다. 이쪽으로 발을 들이게 된 과정이 후다닥 뇌리를 스쳤다.

 

탐정이 된 첫 번째 동기는 죄책감이었다. 승주 대신 지방대학 강의 대타를 가줬던 친구가 학교 밖 골목길에서 뻑치기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몸도 못 가눌 만큼 충격이 컸지만 점차 제정신이 들면서 억울함이 울컥거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경찰서와 범죄학전문가들까지 찾아다니며 뻑치기 관련 자료를 닥치는 대로 입수했다. 활자 기록물을 분석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신 있었다. 범죄기록이라고 특별히 다르겠는가. 난해한 철학서와 문예이론을 청소년용으로 요약해 내는 솜씨라면 형사 문건도 해독해 낼 수 있으리라.

 

범인에 대한 복수심이 보태지면서 박사논문 쓰던 시절보다 더 진지한 마음으로 몰두했더랬다.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 형사들을 닦달했고, 경찰서로 야식을 사들고 간 어느 날, 담당 형사는 범인이 잡혔다며 히죽 웃어보였다.

 

이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승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죄책감이 지나간 자리에 요상한 불씨 하나가 스멀거리는 걸 느끼고 말았다. 지금까지 승주는 학문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연구했다. 그동안의 연구가 간접적인 겉핥기였음을 그 요상한 불씨가 일깨워주었다. 생생한 인간 철학을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죄책감에 시달릴 때보다 더 맹렬히 끓어올랐다.

 

수사학으로 점철된 예술철학이 아닌, 치명적일 정도로 적나라한 인생 그 자체로 뛰어들어 피가 튀기면 피를, 울분이 치밀면 울분을, 발가벗겨진 언어로 가감 없이 인간사를 증언하고 싶었다. 승주는 결과가 어찌 되든 열정적인 목표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멋들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뭔가. 탐정으로서 처음으로 의뢰받은 사건을 앞에 두고 벌벌 떠는 나약함이라니. 강력사건의 날 비린내를 직접 맞닥뜨리려면 무쇠심장을 엔진으로 달아야 하는 것을.

 

승주는 작은 모니터에서 펼쳐지는 코미디 영화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우스꽝스런 장면에서조차 숙연한 다짐이 불쑥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채널을 돌렸다. 죄다 전체 연령 관람에 맞춰진 선량한 내용들이었다. 이 보수적인 콘텐츠 목록 안에서 잡념을 휘어잡아줄 만한 도발적인 영상은 없겠지. 승주는 계속 채널을 돌렸다.

 

말수가 확 줄어든 건 독 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커피가 용기의 미약이라도 되는 양 숙연히 들이마셨다. 쌉싸래한 향기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편안해지다가도 불쑥 두근거림이 꿈틀거렸다. 탐정, 드디어 탐정인가? 내가? 아……

 

탐정업과 관련해서라면, 독 소장 역시 승주와 비슷한 처지였다. 변호사라서 형사사건을 다뤄본 경력은 제법 되지만, 경험이라고 해봐야 결국 서류상에서 오가는 활자에 불과했다. 법정다툼은 사건의 핵심이 이미 한 꺼풀 꺾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변호사가 끼어들 시점이면 모든 살풍경은 정리되고 이미지와 기록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범인은 더 이상 미지의 괴물이 아니며 형사의 절박함도 흘러간 과거로 휘발돼버린다. 쫓고 쫓기는 절체절명의 신화는 어느새 법조인들의 서류작업으로 박제된다. 독 소장은 변호사 업무에 자부심이 있었다. 사건을 갈무리하거나 반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허전한 마음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럴 때면 사건 기록을 되짚으며 기록되기 이전에 벌어졌을 긴박한 상황을 상상하곤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마지못해 불살라버린 꿈이 하나쯤 있다. 독 소장도 그랬다. 우연히 공부를 잘 했고, 우연히 사법고시에 붙었고 우연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우연히 평탄한 삶을 살아 왔다. 성공한 인생을 으스대며 부부댄스와 여행으로 소일하면 남은 인생도 우연히 평탄하게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독 소장은 더는 ‘우연’이 싫었다. 남은 인생은 필연으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탐정의 꿈이 치기 어린 공상이 아니라 마음속 불덩어리라는 걸 알면서 무엇 때문에 애써 묻어버리려 하는가. 나이 때문에? 체면 때문에? 이목이 두려워서?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 이제는 그러거나 말거나다. 두렵지만 극적으로 살 떨리는 현장! 악당을 합법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역동적인 세계가 노년이 머지않은 독 소장을 사무치게 유혹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의지가 서고 나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탐정이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고민이 따라붙었다. 법정공방 이전에 벌어지는 세계는 판사도 경호원도 없는 무법지옥이다. 탐정은 무법지옥에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혈혈단신이 아닌가.

 

독 소장은 격투기술은커녕 달음박질도 신통찮았다. 부부댄스로 단련된 몸놀림은 또래에 비해 월등히 유연했지만 탐정 자질과는 무관했다. 허허, 준비되지 않은 자의 꿈은 이리도 부실하구나. 독 소장은 자괴감이 들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인생 뭐 있냐며 이미 체면 따위 벗어버렸다. 젊어서 고생 한번 못 사봤으니 이제라도 한번 시원하게 충동구매해 보자며 호탕하게 웃어넘기지 않았던가.

 

독 소장은 일단 저질러보기로 했다. 현실이 람보 영화처럼 술술 풀리지도 않지만 공포영화처럼 순식간에 작살나지도 않는다. 우선은 이성적인 탐정으로서 머리싸움을 하면 되는 거다. 박학다식한 동업자도 한 놈 얻었잖은가. 강승주! 인터넷 탐정 동호회 카페에서 친하게 지내다 오프라인까지 이어진 인연이다. 아들뻘 녀석이지만, 아니, 이왕이면 조카뻘로 하자. 젊은 친구가 명석한데다 마음까지 통하니 이런 유능한 동지를 얻었다는 건 탐정업의 청신호가 아니고 뭐겠는가.

 

행운의 여신, 아니, 탐정의 여신이 독고잉걸 변호사 사무소를 굽어 살피려는 기특한 징조렷다. 자, 그러니 몸싸움 실력은 일단 보류하자. 우선은 하드보일드 탐정보다는 안락의자 탐정으로 가는 거다. 뭐, 제길, 머리싸움도 하다 안 되면 쉬엄쉬엄 하면 된다. 어쨌거나 일단 저지르자. 평탄하게만 살아온 독 소장의 머릿속에서 위험한 배짱이 불끈거렸다.

 

비행기가 기류에 밀려 살짝 덜컹대며 흔들렸다. 난기류 따위는 두 사람의 생각을 잡아끌지 못했다. 승주는 잡념을 떨쳐내 줄 대상을 떠올리고는 볼멘소리로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경비업법 개정안은 어떻게 되는 거래요? 발의한 지가 언젠데 매번 감감무소식인지.”

 

“경찰이랑 검찰이랑 서로 자기들이 맡겠다고 싸우고 있잖아. 지난번에도 그것 때문에 엎어졌는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