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

  • 장르: 일반
  • 분량: 70매
  • 소개: 한 가수를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성장물 더보기

붉은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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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토요일의 지하철 역전. 만남의 장소에 설치된 대형 TV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고 있다. 엄마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던 한 어린아이, 티없이 까만 눈동자가 환호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붉은 색 남방과 찢어진 청바지. 머리 위로 들어올린 양 손과 한쪽으로 조금 구부린 긴 다리가 음악에 맞추어 서서히 약동한다. 액정에 펼쳐지는 화려한 춤사위를 보는 순간 어린아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엄마. 저기. 저기 좀 봐. 엄마.”

 

 

 

“아, 우리 신이가 좋아하는 현희 언니가 텔레비젼에 나왔구나?”

 

 

 

“응. 현희 언니 춤추나 봐. 보고 가자. 응? 엄마.”

 

 

 

“우리 신이 어쩌면 좋니. 현희 언니가 그렇게 좋아? 작년 까지만 해도 수련이 언니가 엄마 다음으로 좋다고 했으면서.”

 

 

 

“수련이 언니도 좋아. 그래도..현희 언니 착하잖아. 불쌍한 애들 많이 도와준데. 나도 현희 언니처럼 될 거야. 용돈 모아놨어. 전부 다 기부할 거야. 현희 언니처럼.”

 

 

 

“그래, 그러렴.”

 

 

 

아이는 엄마의 손을 꼭 잡은 모습 그대로, TV를 관람하고 있는 수많은 군중 속의 한 명이 되었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쇼 프로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예능인. 김현희. 나이 25세. 여성. 23세에 학업을 마치고 1년 남짓 사회생활을 한 후 운명처럼 성우에 도전. 낙방에 굴하지 않고 몇 개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잇달아 출연하며 서서히 자신을 알린 여인이었다. 정열적인 탱고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이 흡사 깃털로 치장된 한 마리 뱀과 같다. 섬세하게 연마된 육체를 감싸고 있는 붉은 남방이 땀으로 젖는다. 두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도약하여 완전한 한 일자로 두 다리를 펼치는 모습. 넋을 빼앗긴 심사 위원들의 표정이 클로즈업 되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춤을 마무리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긴장과 수줍음으로 상기된 얼굴 표정이 드러났다.

 

 

 

“예, 정말..너무나 아름다운 무대였습니다. 자, 여러분. 현희 씨에게 박수를!”

 

 

 

복받히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는지 사회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박수 갈채에 둘러쌓인 현희는 거듭 거듭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역시 김현희야. 아주 끝내주는구만.” “어쩜, 같은 여자가 봐도..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도발적이고 섹시할 수 있을까.” “김현희 데려가는 남자는 좋겠다! 부럽네, 부러워.” 군중 사이로 들려오는 환호. 신이는 어느새 엄마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런 딸을 내려다 보던 엄마는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 손을 잡는다.

 

 

 

“자, 이제 가야지.”

 

 

 

“응. 엄마, 나 오늘 영어 동화책 세번 읽을 테니까. 현희 언니 나온 오디션 프로그램 한번만 더 볼게. 응? 엄마.”

 

 

 

“아이구, 우리 딸..그렇게도 현희 언니가 좋아요? 엄마가 아주 샘이 다 나네. 그러렴.”

 

 

 

“헤헤. 고마워. 엄마.”

 

 

 

신이가 집으로 돌아가려면 번화가를 거쳐야 했다. 그 중 가장 높이 솟아있는 빌딩, 최신 시설의 영화관 광고판엔 액션 배우로 분장한 김현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검과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극장 팜플렛과 장난감 칼을 들고 있는 남자아이들이 그 모습을 흉내내는 모습이 보인다. 신이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엄마를 보채지 않았다. 조금만 더 크면 친구들과 함께 현희 언니가 나오는 액션 영화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초등학교에서 가끔 부모님과 함께 현희의 액션 영화를 보고 왔다며 자랑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신이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현희 언니가 직접 찍은 ucc 영상을 떠올리곤 했다. 영화 촬영 도중, 분장을 반쯤 지운 얼굴을 한 김현희가 어린 아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안녕. 얘들아. 나는 김현희야. 이번에 찍은 영화를…너희들은 아직 볼 수 없을 거야. 이 영화엔 너희들이 보기 불편한 장면이 많이 있거든. 물론 부모님께 부탁하거나, 좋지 않은 경로로 보는 방법도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난 너희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자란 다음에 이 영화를 봐주었으면 좋겠어. 세상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일들이 많이 있지. 난 그런 어두운 세상을 조금 더 밝혀 주고 싶어서 이 영화에 출연한 거야. 하지만 참 얄궂게도, 그런 뜻을 전달하기 위해선 그 어두운 면을 들추어 내야 했어. 가슴 아픈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지. 얘들아. 너희들은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내가 영화에 출연해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각자의 몫을 하기 위해 나아가야 해. 물론, 지금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게 중요하지. 친구들과 항상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난 기다리고 있어. 너희들이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 때 부디 건전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말이야. 내 생각이 너무 유치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그 유치함에 내 모든 힘을 다하고 있어. 나는 내가 능력을 더 쌓아서 너희들이 보기에 문제가 되지 않고 이 세계에서 고쳐져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단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기다려 주었으면 해. 나를 사랑해주는 너희들이 있어서..난 참 기쁘고..때론 슬프기도 하지만..아주, 아주 많이 행복해. 여기까지 이 영상을 봐줘서 고마워. 오늘 밤엔 꼭 부모님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에 잠들도록 하자. 자, 약속.”

 

 

 

약속. 동영상 가운데로 리플레이 마크가 떠올랐을 때 신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민 채 한참 동안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날밤 부모님의 뺨에 입을 맞추며 “사랑해요.”라고 말한 후 작은 침대에 누웠다. 현희 언니가 내 꿈에 나왔으면..기도하면서.

 

 

 

신이의 엄마는 노력하는 딸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었다. 신이가 거실 탁자에 앉아 산수 문제집을 푸는 동안 다시 보기 서비스로 현희의 무명 시절 오디션 프로그램을 틀어준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진심을 다해 노래부르는 현희. 신이는 노래가 나오는 동안 정말로 집중해서 문제집을 풀었다. 면접관들의 평이 나올 때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 같아. 한 4-5년 정도 있다가 나와보세요. 저는 불합격 드리겠습니다.”

 

 

 

“음악을 배워보지 않았다고 했죠?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괜찮네요. 얼굴도 동안이고 몸매 괜찮고. 막말로 상품가치는 있어 보입니다. 저는 합격입니다.”

 

 

 

“노래 연습 더 하세요. 불합격입니다.”

 

 

 

냉정한 평가. 얼핏 가혹한 장면으로만 보였지만 현희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불합격 판정을 받은 순간. 현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무구한 웃음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자신의 활약을 예고하는 듯 너무나 당당한 모습. 이후 현희는 일년 동안 계절에 맞추듯 각기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밴드. 댄스. 연기.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 성장해나가는 현희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탈락할 때마다 환하게 웃는 현희. 어느센가 인터넷 사이로 현희의 연습 동영상에 떠돌기 시작했다. 하루에 5시간을 자며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시간을 예능 연습에 바치는 모습. 약 1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현희는 자신이 1차에서 불합격된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 다시 출연하여 우승을 움켜쥐었다.

 

 

 

“제가 보기에..1년 전 이 프로그램에 현희 씨가 출연했을 때..실력을 일부러 감춘 것 같네요. 우리를 놀린 건가요?”

 

 

 

“악마한테 혼 팔았어요? 노래라는 게 이렇게 빨리 느는 분야가 아니예요.”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으니까.”

 

 

 

취조라도 하는 듯한 심사위원들. 피로에 지친 현희는 가식적으로나마 웃음을 지었다. 짙게 드리워진 다크서클을 매만지면서, 기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수많은 팬들이 현희를 사랑하게 만든 짧은 대답을 했다.

 

 

 

“연습을..했을 뿐입니다..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을..”

 

 

 

그 후 현희는 솔로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단지 노래를 좋아하던 평범한 여인이 탑 클래스 급 가창력을 가진 가수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리곤 하는 의지. 소망. 그리고 노력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준, 이 시대의 성장. 그리고 기적의 아이콘. 김현희 씨의 무대입니다!”기성 가수들도 선망하는 고품격 음악 프로그램에서 프로로서의 첫 무대를 가진 김현희. 새빨간 남방을 입고 3옥타브의 깨끗한 고음을 자유롭게 끌어내는 그 모습은 예능계에서 화제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부와 명예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현희에게 주어졌다.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점차 드라마, 영화 배우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2-3년 동안 안티 팬들은 돈벌레라는 딱지를 붙이고자 했지만 데뷔 시작부터 한달 생활비 100만원을 제외한 모든 수익 전액을 기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년 소녀들은 마치 신앙처럼 현희를 사랑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김현희는 거의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자아, 오늘은 그만. 그만 자야지. 신이야.”

 

 

 

신이는 밤 11시에 시작하는 토크 쇼를 보고 싶었다. 현희가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예고 방송이 자꾸 머리를 맴돈다. 하지만 웃는 얼굴로 문제집을 정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신이. 일주일만 기다리면 다시 보기 서비스로 볼 수 있어. 부모님이랑 같이 볼 거야. 현희 언니가 늦게까지 혼자 TV를 보는 건 안 좋은 버릇이라고 했으니까. 참아야지.

 

 

 

신이는 그렇게 윤리 교과서 같은 현희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엄마 손을 잡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번화가를 걷게 되었을 무렵. 현희는 외국 영화의 주연으로까지 활동을 시작했다. 비디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현희는 새빨간 코트를 두른 채 두 자루 총과 거대한 검, 그리고 게임에 등장하는 갖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흔한 말로 내용없는 눈요기 영화였지만 볼거리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래픽 조작과 와이어, 대역 배우도 없이 자신의 신체 능력만으로 영화를 리드하는 현희. 영화의 절정. 찢겨진 붉은 코트가 휘날리는 가운데 레오타드복으로 둘러쌓인 근육과 골격이 노출되자 관객들 사이로 탄성이 들려온다. 얌전한 성격의 신이도 영화를 보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꺄아…소리를 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현희 언니 너무 예뻐..너무 멋있어. 귀여워..”

 

 

 

영화가 끝나고 햄버거 가게에 앉자마자 신이는 양 손을 맞잡으며 환상을 보는 듯 눈을 반짝였다. 친구들은 어이구 또 시작이네, 꺄르륵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어 댄다.

 

 

 

“김현희 몸매 정말 쩔더라. 어쩜 그렇게 날씬하면서 예쁠 수가 있을까?”

 

 

 

“그거 알아? 서양 남자 보디 빌더가 영화 시사회에서 보고 그랬대. 김현희가 남자였다면 세계 탑 클래스의 보디 빌더가 되었을 거라고. 그럼 말 다했지 뭐.”

 

 

 

“야야, 그런 소리 하지마. 김현희가 남자였어 봐라. 벌써 우리 신이가 채가버렸을걸.”

 

 

 

“무, 무슨 말이야…망측하게..난..나는..그냥 현희 언니의 팬일 뿐이야..나 동성애자 아냐..”

 

 

 

“푸힛, 신이 여사님. 왜 말을 더듬으세요. 부끄러울 거 없어. 우리 나이 때는 동성애를 느낄 수도 있다고 성교육 수업에서 들었잖아.”

 

 

 

“가만 있어봐. 성교육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혹시..김현희 동성애자 아닐까?”

 

 

 

“에..? 설마! 여자답고 예쁘잖아.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랑 얼굴이 강해보이긴 하지만.”

 

 

 

“아니야. 아니야.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면 되게 터프하게 굴잖아. 그게 컨셉이라지만 데뷔 한 지 몇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건 운동하는 거하곤 다른 거야.”

 

 

 

“그런 소리…하지마..계속 그러면..나…화낼 거야.”

 

 

 

신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확고했다. 친구들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신이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희 언니가 동성애자라고? 아냐, 그럴 리 없어. 현희 언니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없으니까 남자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 뿐이야. 그리고 바쁘잖아. 매일 혹독한 훈련을 한다고 했어. 콘서트랑 자선사업..드라마에도 계속 출연하고..매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잖아. 그래. 현희 언니는 아주 성실하단 말야. 쓸데 없는 연애는 하지 않는 거야.

 

 

 

집에 돌아온 신이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벽에 걸려있는 현희의 포스터와 수많은 사진들. 무의식 중 신이는 노래를 열창하는 현희 옆에 있는 세션 연주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남자니까..현희 언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겠지. 나같은 어린애들은 알 수 없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그게 정상이니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잖아. 신이는 난폭한 손동작으로 책장에 꽂힌 문제집을 빼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팬을 손에 쥐는 신이. 본래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도 있었지만 지금 신이의 행동은 현실도피에 가까웠다. 한 시간 쯤 되었을까.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린다. 엄마였다.

 

 

 

“신이야..밥 먹어야지..?”

 

 

 

“생각 없어. 햄버거 많이 먹어서 소화 하나도 안됐어. 그냥 공부할래. 배고프면 있다가 라면 먹을게.”

 

 

 

“무슨 일 있었구나. 영화가 재미없었어? 혹시..친구들하고 싸운 거니..?”

 

 

 

“그런 거 아니야! 엄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신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톡, 책상 위로 떨어지는 팬.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거야..? 엄마한테..? 신이가 엄마에게 언성을 높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이는 고개를 돌리고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1분 남짓한 침묵이 흐른 후에야 엄마는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신이야..계속 공부하렴. 있다가 맛있는 거 해줄게..”

 

 

 

딸칵. 문 닫히는 소리가 신이의 심장을 자르듯, 무거운 떨림으로 전해졌다. 신이는 입을 가리고 있는 손을 거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