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께서 베틀의 옷감을 단칼에 잘라 버리신 이후로 왕은 시름시름 앓으셨다. 왕비께서는 왕 대신 등활에 수로를 내는 공사를 감독하셨다. 늘 왕비에게 주눅들어 계시는 듯 했던 왕자는 훌쩍 자라셔서 왕비에게 밀리지 않으셨다. 두 분 사이는 늘 서늘했다.
“아버지께서는 이제 곧 돌아가실 겁니다. 왕비님께서 제 아버지를 죽이신 거예요. 왕비님께서 그 때 자르신 옷감은 수명을 결정하시는 테오게이아 여신의 베틀에 걸려 있던 거였습니다. 왕비님께서 제 아버지의 수명을 잘라버리신 겁니다.”
“그 때 그게 왕의 목숨이라는 말은 조금도 안 했지 않느냐.”
“그 때는 몰랐습니다. 베를 자르면 안 된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제가 그렇게 애원했지 않습니까.”
“마니족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왕께서 어떻게 되실지 알았어도 난 그렇게 했을 거다.”
왕비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제물로 바쳐지는 소가 사제를 노려보듯 왕자를 보시다가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사바의 복수라도 하려는 것이냐?”
왕자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으셨다. 왕비의 등 뒤로 보이는 풍경만 바라보시던 왕자께서 천천히 혼잣말을 하셨다.
“어쩔 수 없겠지요. 다 끝나버린 일. 복수라는 것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요.”
등활의 공사가 완공되어 갈수록 사바왕의 병세는 나빠지기만 했다. 날이 갈수록 야위셔서 눈이 움푹 들어갈 지경이었다. 공사가 완공되던 날, 왕자께서는 등활 대신 왕의 병실에 계셨다.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급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시끌벅적한 축제의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왕자께서 왕의 손을 감싸 쥐셨다. 왕께서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너는 내게 빛이었고…내가…잃은 목소리였다….”
“저도요, 아버지.”
왕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 갔다. 왕께서 망설이시다가 체념한 듯 말씀하셨다.
“내가…죽였다……. 유소도, 이데아도, 그 아린 여자도…….”
툭. 테오게이아 여신께서 남아있던 한 오라기 실을 잘라내셨다.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제들이 달려왔다. 왕자께서 왕의 손을 놓으셨다.
“축제에 참여하지 않고 뭐 하고 계십니까. 가서 축제를 즐기십시오. 장례는 축제가 끝난 후에 치를 겁니다.”
너무나도 담담하신 왕자의 태도에 사제는 어찌할지 모르고 서 있기만 했다. 왕자께서는 이불을 끌어올려 왕의 얼굴을 덮으시고 밖으로 나가셨다.
사바왕의 서거 이후 사제들은 아니디아 왕자께 끈질기게 아린 사냥을 요구했다. 사바왕의 생전에는 왕께서 아린 사냥을 강력하게 금하셨지만 지금은 왕께서 계시지 않다.
“왕자께서 아린 사냥을 원치 않으신다면 나도 왕자의 편을 들지요. 왕자의 생모가 왕자를 나와 선왕께 넘길 때 조건이 왕자가 아린을 죽이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린을 사냥하지 않으시겠다면 왕위도 포기하셔야 할 텐데.”
“생모라니요?”
“그런 여자가 있었지요. 더 알고 싶으시면, 혼자 알아서 알아보세요. 난 그 여자를 입에 올 리기도 싫으니까.”
왕자는 선왕비의 말씀을 담아두신 채 사제들 앞에 나서셨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시고 상의의 단추를 풀고 허리띠를 푸셨다. 세로로 곧게 뻗은 척추와 매끈한 등이 드러났다. 등에는 늠름한 흰사슴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 몸에 흠결이 있으면 신께 바쳐질 아린을 사냥할 수 없었다. 사제들이 술렁였다.
“선왕께서 직접 새겨 주셨습니다.”
“몸에 흠이 있는 데다가 사냥도 하지 못 하는 자가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왕의 조건은, 카르마왕의 혈통이냐는 겁니다. 피부의 문신이 혈관의 피를 바꿀 수 있습니까?”
아니디아 왕자께서는 왕이 되셨다. 왕의 재위기간 동안 단 하나의 아린도 화살을 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