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추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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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 리뷰 겸 추천

분류: 작품추천, 글쓴이: 채명준, 17년 12월, 읽음: 127

처연하게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후원에 핀 제비꽃』

 

이것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두서 없이 쓰는 리뷰이고, 그다지 정연한 형식을 갖춘 비평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나는 이 리뷰를 써야 한다고 믿는다. 『후원에 핀 제비꽃』은 정말로 좋은 로맨스 소설이고, 나는 로맨스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소설을 읽었으면 한다. 그만큼 이 소설은 독특한 울림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소설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 보다 엄격한 독자라면, 이 소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기교가 없고, 완곡어법과 관조적 태도의 가장이라는 세련미가 없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너무 성급하게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비극에 관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많은 주제들이 투박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악의 문제. 악의 평범성. (보다 유신론적인) 범재신론. 선과 악이라는 이항대립의 불투명함. 구조에 의한 가치전도와 같은 도덕철학적 문제들. 삶의 수수께끼 혹은 실존의 부조리라 불려왔던 것. 신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였는가.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인가. 인간은 신을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그러나 이런 주제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다. 이렇게 그 함축의미를 가볍게 요약해버린다면, 이 소설은 단지 신정론을 바탕으로 되풀이되어온 진부한 계몽주의 소설이요, 고전적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속물성과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지난한 주제다. 이미 소위 말하는 ‘고급예술’에서 수천년 동안 되풀이되어온 주제인, 속물 대 신성의 지독한 변증법이 이 소설에서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증법적 파노라마는 왜 속물의 세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끊임없이 신성함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소설은 이미 시대착오적 엘리트주의가 되어버린 고급예술의 형식을 가장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생생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솔직하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그려낸다. 인간은 사랑하는 한 구원받을 수 있으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리라는 파우스트적 주제가 가장 대중적인 소설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해묵은 다이몬의 속삭임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하는 욥의 저주와 절규가, 그 존재의 비극적 예감이 구원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급예술을 시대착오라 비난한다면, 이 소설 역시나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니체주의적 사유가 일반화 되었고, 자기 자신에게 강한 존재가 되는 것, 비극적 세계를 자기긍정하는 것이 삶의 일반태도가 된 지금, 신정론과 구원에 관한 이 기나긴 로맨스 소설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다. 현대는 진화론과 우연과 확률의 시대다. 더는 누구도 신에게 선의 기원을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은 당당하고도 의젓하게, 인간의 정신성이라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오직 악을 떠넘기기 위해서만 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제1세계 시민에게는 이 소설의 동화만이 남고 그 아래에 깔린 절박한 리얼리티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나 관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대착오성은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필연적으로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궁정연애에서 비롯된 고상한 기사도문학은, 그 태생부터가 철저한 자기기만과 시대착오에 근거했다. 그 시대착오 속에서 진실한 것을 찾아내려는 몸부림 속에, 소설이라고 하는 귀중한 문학적 장르가 탄생했다. 소설은 그러한 시대착오성까지도 대중소설의 소설적 가치라고, 그렇게 기꺼이 말하는듯하다.

『후원에 핀 제비꽃』은 여느 대중 소설이 그러한 것처럼, 비극적인 장엄함으로 끝을 맺기보다는 희극적인 비전 속에서 마무리된다. 나는 희극보다 비극을 더 선호하고,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파멸해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문단의 기준에 부합하는 ‘대중소설’이 아니라, 상업적 대중문학이 대중적 예술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기교적으로 투박하고, 감정적으로 신파적이기는 하지만,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아이러니의 끝에서 나는 결코 키치라고 비웃어버릴 수 없는 구원의 소망을 본다. 이 소설은 존재의 비극을, 그 무엇보다도 처절하게, 가장 대중적인 사명에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코 고상함을 가장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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