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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 감상

분류: 책, 글쓴이: 위래, 19년 9월, 읽음: 517

“(생략)…그 쇠꼬챙이 치워라, 꼬맹아. 요정이 죽을 때 저주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하! 그래봐야 내 엄마 아빠란 연놈만 하겠어?”
“뭐? 네 부모가 뭘 했는데?”
“날 낳았지!”

현대문학 VOL 777 p174-p17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

다 보았다.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다만 이영도의 현대 판타지(“그림자 자국”이 근대 판타지였다고 생각하면)는 처음으로 보인다. ‘봄이 왔다’ 빼고(이걸 제도권 소설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엽편이랑(기억 잘 안 남). 사실 현대는 아니고 정확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인데. 작품에서 사용하는 장치와 동일한 것은 다들 내 추천으로 읽어보았을 “클락성 살인사건”과 유사하다. 지구는 멸망해가고 남은 인류는 백일몽 속에서 환상종을 보게 된다. 때문에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작동하는데, 판타지와 은유에 대한 담론은 고릿적에 끝났으니 넘어가자.
온갖 날 것의 신화 생물들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주요 인외종은 요정과 드래곤, 간다르바다. 캇파도 나온다. 주인공 시하는 드래곤의 보호 구역 안에 사는데 배가 고파 쥐를 잡으려다 쥐잡이 틀로 요정을 잡아버린다. 그리고 좋아하는 칸타라는 친구가 있는데 옆동네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이정도가 소설의 도입부. 마트는 우리가 아는 그 마트가 맞다. 인간 모임이 마트고, 간다르바와 캇파, 드래곤이 각자의 영역을 형성한 정치적·지리적 지형도를 형성하고 알력 관계가 있다. 이정도가 소설의 배경. 도입부는 “피어클리벤의 금화”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재밌게 읽었을지도?).
아무튼 소설의 디테일은 신화 지식(*크툴루 아님)에 기대고 있는 경향이 있으며 이영도 특유의 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주제로 향해가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발언 속에서 인물들이 깨달음을 얻어 쉽게 설명되지 않는 행동으로 나아가 종극에 이르는 ‘이영도류’ 소설인데 이전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은 이차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칼 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원에 근거한 서사를 이루려고 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소설에선 이영도가 지금까지의 만들었던 여러 요소들의 시발점처럼 느껴지는 디테일들이 등장하는데, 뒤늦게나마 비밀을 파헤친 것 같은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예전에 써둔 건가?) 제도권 문예지에 작품을 드러내야 하는 압박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왜냐하면 제도권에선 장르 판타지의 근간을 발가벗겨 드러내지 못하면 독해를 못하는 치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뻔뻔하게 제도권 작법을 무시하고 늘 하던 그 방법으로 소설을 풀어나가기 때문에… 생태주의, 사랑, 사람(인간)과 사람(비인간)의 만남, 불협화음, 템페스트적(*사견)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서 각자의 결말 맞으며 종막. 사실 이영도에게 기대되는 장르적 로망스가 본 작품에선 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다. 이야기의 호흡이 가쁜 것도 있고. 더 길면 좋았을 것.
그럼에도 브릿G에서 오버 더 초이스 전까지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던 작가가, 의외의 지면에서 의외의 소설로 찾아온 것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을 생각하면 본 작품은 훌륭하다 말해야 할 것. 다작하면 더 좋을 것이다. (캠페인: 당신의 도서 구매, 작가를 글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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